타블로 사건은 비단 연예인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야. 사람 모여 있는 곳이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 특히 교회에서 자주 일어날 수 있는 일이야. 예를 들어 의자 접었다 폈다를 제일 잘하는 청년이 있다고 치자고. 그의 의자 접었다 폈다의 실력은 신기에 가까워. 그리고 그의 성품과 인격 또한 착하고 생긴 것은 또 얼마나 잘생겼는지. 그의 믿음과 신실함은 두말할 나위 없어. 이런 이유로 해서 그는 거의 교회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최고의 대표 청년으로 인정 받고 있지.
자연히 다른 청년들은 그를 동경해. 아니 그를 동경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누리고 있는 인기와 가진 것들을 자신도 누리고 싶어하지. 하지만 아무리 자신을 둘러봐도 그렇게는 쉽게 되지 않을 것 같거든. 따라서 그들은 아주 조용히 좌절감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지. 이 좌절감은 차츰 차츰 응어리로 여물게 되는데 이걸 가만 놔두면 사람 미쳐버려. 이에 대한 긍정적인 해결 방법은 자신도 노력하고 해서 그렇게 되거나 아니면 내가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는 것일 것인데, 인간인지라 그렇게는 못하겠고 해서 결국 선택하는게 그 잘나가는 청년을 자신과 같은 범인으로 몰아버리는 것이야. 욕구 불만의 소스가 사라지게 되면 좌절감을 느낄 필요도 없는 것 아니겠어? 이쁜 여자들에 대해 '성적으로 문란하다'는 소문을 퍼트리거나 성격 좋고 리더쉽이 있는 아이들에게는 '사실 나쁜 애다. 그리고 안좋은 소문을 여기 저기 퍼트린다' 등의 루머를 퍼뜨려서 왕따 시키는 현상은 동경의 대상을 자기와 똑같은 수준의 인간으로 만들어서 자신의 좌절을 극복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출발하는 것이지.
이런 문화는 근절될 필요가 있어. 왜냐면 조직이 발전을 못해요.
Tae's Blog
Wednesday, October 6, 2010
Friday, July 16, 2010
십일조와 세금
2세들의 대부분은 십일조를 하지 않는다. 아마도 우리 2세들이 '모델'로 삼으려는 교회의 모습이 한인 1세 교회가 아니라 미국 교회의 그것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십일조가 공공연히 암묵적인 형태로 강요되는 곳은 지금 전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한국 교회 뿐이다. 성서의 조그만한 문자적 해석 가지고 피터지게 싸우고 서로 이단이라 손가락질 하면서도 정작 십일조 문제에 대해서는 놀랍게도 단합된 모습을 보이는 것이 한국 교회의 현실이다.
물론 대부분의 한국 교회도 '십일조'를 율법 준수 차원에서 강요하지는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분명히 문제가 있는 교회이며 교리적으로는 이단 판정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다행히 한국교회 대부분은 십일조를 "안내면 구원없다"식의 율법 준수 차원에서 강요하지 않고 이를 "현세의 물질은 주님께 속한 것임"을 고백하는 신앙의 표현으로서 간주하여 한 인간의 믿음 정도를 측정하는 지표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십일조를 내는 신실한 인간을 주는 가만 놔두지 않으시고 그에게 복에 복을 더하사 하늘에 있는 개인 창고에 몇 배로 채워 주실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 하다. 사실 말이야 맞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 교회의 공기 속에 감도는 '십일조 강요'의 기운과 공존하는 '뭔가 아닌데'의 기운은 쉽게 설명되기 힘들다. 사실상 실질적인 효과면에서 이해하자면 십일조는 현대의 인간에게 적합하지 않는 개념이다. 당시 레위 지파에게 바쳤던 십일조는 정치와 종교가 하나였던 과거의 신정체제에서는 세금과도 같은 개념이었다. 따라서 이 십일조는 레위인들의 생계 유지를 위해 쓰였을 뿐만 아니라 빈민들을 구제할 때에도 쓰였다. 다시 말하자면 구약의 성전 제사가 실질적으로 현실적인 효용을 가졌고 그들의 삶과 경제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던 시대에 십일조란 정말이지 필요한 물질이 아닐 수 없었고 오늘날 우리 시대에 비추어 보자면 이는 다름아닌 세금인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십일조는 강조하지만 정부가 세금 조금 올리는 것에 대해 분개하며 치를 떠는 몇몇의 보수적인 우파 크리스챤들의 행태는 참으로 황당하지 않을 수 없다. 세금 좀 더 내서 의료보험이 없는 사람들 커버하자는 취지에 대해 무슨 미국에 자유가 없어졌다는 둥, 이제 미국이 사회주의를 넘어 공산주의가 되지 않겠냐는 둥의 격언을 서슴치 않는 분들 중에 헌금 잘내고 벤츠타고 다니시는 신실하신 크리스찬이 많다는 점이 나로서는 참으로 황당할 뿐이다.
아무튼 사실상 성서 그 어디에도 신약시대의 인간에게 십일조를 강요하는 구절은 없다. 구약의 구절들을 들먹이고 이를 강요하는 것은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과 그가 이루신 업적을 모독하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그대가 진실로 말씀에 충실하고 싶다면, 그리고 정녕 물질이 주의 소유임을 고백하자는 취지에서 그리고 믿음의 척도로서 십일조를 강요하고 싶다면 나는 아래의 성서 말씀을 권하고 싶다: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마 19:21).
주의 제자로 사역하시는 분이 자신도 십일조 낸다고 십일조의 본을 세우려는 모습은 참으로 창피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대형 교회의 대부분의 목회자들의 생활 수준은 재벌 뺨치는 수준이다. 수입만 10억 이상이신 분들이 있다고 하니. 이런 분들이 "말씀에 근거하여" 십일조를 강요하는 짓은 정말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십일조를 강조하는 그대여,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주를 따르라!
물론 대부분의 한국 교회도 '십일조'를 율법 준수 차원에서 강요하지는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분명히 문제가 있는 교회이며 교리적으로는 이단 판정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다행히 한국교회 대부분은 십일조를 "안내면 구원없다"식의 율법 준수 차원에서 강요하지 않고 이를 "현세의 물질은 주님께 속한 것임"을 고백하는 신앙의 표현으로서 간주하여 한 인간의 믿음 정도를 측정하는 지표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십일조를 내는 신실한 인간을 주는 가만 놔두지 않으시고 그에게 복에 복을 더하사 하늘에 있는 개인 창고에 몇 배로 채워 주실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 하다. 사실 말이야 맞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 교회의 공기 속에 감도는 '십일조 강요'의 기운과 공존하는 '뭔가 아닌데'의 기운은 쉽게 설명되기 힘들다. 사실상 실질적인 효과면에서 이해하자면 십일조는 현대의 인간에게 적합하지 않는 개념이다. 당시 레위 지파에게 바쳤던 십일조는 정치와 종교가 하나였던 과거의 신정체제에서는 세금과도 같은 개념이었다. 따라서 이 십일조는 레위인들의 생계 유지를 위해 쓰였을 뿐만 아니라 빈민들을 구제할 때에도 쓰였다. 다시 말하자면 구약의 성전 제사가 실질적으로 현실적인 효용을 가졌고 그들의 삶과 경제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던 시대에 십일조란 정말이지 필요한 물질이 아닐 수 없었고 오늘날 우리 시대에 비추어 보자면 이는 다름아닌 세금인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십일조는 강조하지만 정부가 세금 조금 올리는 것에 대해 분개하며 치를 떠는 몇몇의 보수적인 우파 크리스챤들의 행태는 참으로 황당하지 않을 수 없다. 세금 좀 더 내서 의료보험이 없는 사람들 커버하자는 취지에 대해 무슨 미국에 자유가 없어졌다는 둥, 이제 미국이 사회주의를 넘어 공산주의가 되지 않겠냐는 둥의 격언을 서슴치 않는 분들 중에 헌금 잘내고 벤츠타고 다니시는 신실하신 크리스찬이 많다는 점이 나로서는 참으로 황당할 뿐이다.
아무튼 사실상 성서 그 어디에도 신약시대의 인간에게 십일조를 강요하는 구절은 없다. 구약의 구절들을 들먹이고 이를 강요하는 것은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과 그가 이루신 업적을 모독하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그대가 진실로 말씀에 충실하고 싶다면, 그리고 정녕 물질이 주의 소유임을 고백하자는 취지에서 그리고 믿음의 척도로서 십일조를 강요하고 싶다면 나는 아래의 성서 말씀을 권하고 싶다: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마 19:21).
주의 제자로 사역하시는 분이 자신도 십일조 낸다고 십일조의 본을 세우려는 모습은 참으로 창피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 교회를 대표하는 대형 교회의 대부분의 목회자들의 생활 수준은 재벌 뺨치는 수준이다. 수입만 10억 이상이신 분들이 있다고 하니. 이런 분들이 "말씀에 근거하여" 십일조를 강요하는 짓은 정말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십일조를 강조하는 그대여,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주를 따르라!
Tuesday, July 13, 2010
왕의 살해

아주 먼 옛날 인간들은 자연에도 영혼이라는 것이 있다고 믿었다. 이 자연은 줄곧 여성성과 연관지어졌고 주로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여신과 연관지어졌다. 로마의 '디아나'나 그리스의 '아르테미스'가 좋은 예다.
여신의 영혼이 깃들어 있는 자연이 생명력을 유지하고 인간에게 다산과 풍요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그녀에게 남자 파트너가 꼭 필요한 법. 인간들은 이 남자 파트너를 위해 그들 중에 가장 정력이 강하고 힘이 센 남자를 세워 그를 '왕'이라 불렀다. 따라서 이 '왕'은 여신의 정령이 깃들어 있을 것만 같은 크고 잘자라는 나무같은 자연의 물체와 사랑하는 관계를 맺었다. 나무를 의인화해서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는 동서를 막론하고 인간 풍습에서 종종 발견되는 행태이다.
따라서 인간들은 자연을 '왕'과 결부시켰고, 그들에게 '왕'의 건강은 곧바로 자연의 건강과 연관되는 것이었다. 왕의 건강이 약해지거나 그의 정력이 형편없어질 경우, 그들은 자연의 여신 또한 만족하지 못하여 자연에 생명력이 떨어지고 이 때문에 사냥이나 농사가 잘 되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인간들은 사냥이 잘 되지 않거나 흉년이 이어질 경우, 또는 왕의 정력이 떨어지거나 그의 건강이 약해졌을 경우 그를 죽이고 그들 중에 건장한 사내를 찾아 새로운 왕으로 세웠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런 식으로 계속 왕을 죽이면 그누가 왕을 하려고 들겠는가. 따라서 왕을 살해하는 대신 그의 분신격인 왕자를 죽임으로서 자연의 여신을 달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것도 야만적이다. 인간 문화가 발달하면서 인간을 희생으로 바치는 일을 동물을 희생하는 일로 대신하게 되었고, 동물중에서도 인간과 가장 흡사한 것들로만 골라 희생의 제사를 올리게 된 것이다.
건강하지 못한 왕을 살해한 그 잔인하고 야만적인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Thursday, July 8, 2010
젊은 카라바조를 위한 묘비
성경에 나오는 사건들을 완전히 새롭게 그려보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은 대체로 대단한 정열과 주의력을 가지고 성경을 읽은 미술가들이었다. 그들은 그들이 과거에 본 모든 그림들을 잊어버리고, 아기 예수가 구유에 누워 있고 목동들이 아기 예수를 찬미하러 찾아오고, 어부인 베드로가 복음을 전도하기 시작했을 때의 정경이 어떠했을지를 상상해보려고 노력했다. 오래된 성경을 참신한 안목으로 읽으려는 위대한 미술가들의 그러한 노력이 분별 없는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어 격분하게 만든 경우는 수도 없이 발생했다.
이러한 '물의'를 빚은 전형적인 예로서 카라바조(Caravaggio)를 들 수 있는데 그는 1600년경에 활동했던 대담하고 혁명적이었던 이탈리아 화가였다. 그는 당시 로마의 한 성당 제단을 장식할 성 마태오의 그림을 위탁받았다. 그 그림은 성 마태오가 복음서를 집필하고 있는 장면과 그 복음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그의 집필에 영감을 불어 넣어 주는 한 천사를 그리도록 되어 있었다.
상상력이 대단히 풍부하고 타협을 모르는 젊은 화가인 카라바조는 늙고 가난한 노동자이며 단순한 세리였던 마태오가 갑자기 앉아서 책을 쓰게 되었을 때의 광경을 생각해내느라 고심했다. 그리하여 그는 대머리에 먼지 묻은 맨발로 커다란 책을 어색하게 거머쥐고, 익숙하지 않은 글을 쓴다는 긴장감 때문에 걱정스럽게 이마를 찌푸리고 있는 <성마태오>(아래)를 그렸다.

그의 옆에는 방금 천상에서 내려와 마치 선생님이 어린아이에게 하듯이 노동자의 손을 공손하게 잡아 이끌고 있는 젊고 아름다운 천사를 그렸다. 카라바조가 제단 위에 걸게 되어 있는 이 그림을 성당에 납품하자 사람들은 이 작품이 성인에 대한 존경심이 결여되어 있다고 분개했다. 그 그림이 수락되지 않아 카라바조는 그림을 다시 그려야만 했다. 이번에는 그도 모험을 하지 않았다. 그는 천사와 성인이 어떻게 보여야 하는지에 관한 인습적인 관념을 엄격하게 준수했다 (아래).

그 결과로 나온 작품은 카라바조가 생생하고 흥미있게 보이도록 대단히 많은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지금도 아주 훌륭한 그림에 속하지만 우리에게는 이 그림이 첫번째 그림보다는 덜 정직하고 보다 불성실해 보인다 <'서양미술사', 곰브리치>.
이렇게 젊은 카라바조는 죽었다. 그리하여 그를 위한 묘비. 근조.
이러한 '물의'를 빚은 전형적인 예로서 카라바조(Caravaggio)를 들 수 있는데 그는 1600년경에 활동했던 대담하고 혁명적이었던 이탈리아 화가였다. 그는 당시 로마의 한 성당 제단을 장식할 성 마태오의 그림을 위탁받았다. 그 그림은 성 마태오가 복음서를 집필하고 있는 장면과 그 복음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그의 집필에 영감을 불어 넣어 주는 한 천사를 그리도록 되어 있었다.
상상력이 대단히 풍부하고 타협을 모르는 젊은 화가인 카라바조는 늙고 가난한 노동자이며 단순한 세리였던 마태오가 갑자기 앉아서 책을 쓰게 되었을 때의 광경을 생각해내느라 고심했다. 그리하여 그는 대머리에 먼지 묻은 맨발로 커다란 책을 어색하게 거머쥐고, 익숙하지 않은 글을 쓴다는 긴장감 때문에 걱정스럽게 이마를 찌푸리고 있는 <성마태오>(아래)를 그렸다.

그의 옆에는 방금 천상에서 내려와 마치 선생님이 어린아이에게 하듯이 노동자의 손을 공손하게 잡아 이끌고 있는 젊고 아름다운 천사를 그렸다. 카라바조가 제단 위에 걸게 되어 있는 이 그림을 성당에 납품하자 사람들은 이 작품이 성인에 대한 존경심이 결여되어 있다고 분개했다. 그 그림이 수락되지 않아 카라바조는 그림을 다시 그려야만 했다. 이번에는 그도 모험을 하지 않았다. 그는 천사와 성인이 어떻게 보여야 하는지에 관한 인습적인 관념을 엄격하게 준수했다 (아래).

그 결과로 나온 작품은 카라바조가 생생하고 흥미있게 보이도록 대단히 많은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지금도 아주 훌륭한 그림에 속하지만 우리에게는 이 그림이 첫번째 그림보다는 덜 정직하고 보다 불성실해 보인다 <'서양미술사', 곰브리치>.
이렇게 젊은 카라바조는 죽었다. 그리하여 그를 위한 묘비. 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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